긴급구호 소식

로힝야 사태 그 후 1년, 로힝야 여성들에게 묻다

2018.09.19 474

2017년 8월

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은 폭력사태를 피해 고향을 떠나, 방글라데시로 도망쳤습니다. 그 수는 70만 명에 달했습니다.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,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캠프가 되었습니다. 현재까지도 유입되고 있는 난민들로 인해 대략 1백만 명 가까이의 난민들이 캠프에 거주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.

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‘고향’이란 더 이상 안전한 품이 아닙니다. ‘돌아갈 수 없는 곳’ ‘그리운 곳’ ‘위험한 곳’으로 그들의 추억 속에 갇혀있을 뿐입니다.

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와 여성 난민들

 

로힝야 난민캠프의 6 가구 중 1 가구는 남편이 실종되거나 살해되었습니다. 그 경우 가장이 된 여성들은 문화나 종교에 따른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반대로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합니다. 아이들을 키우며 콕스 바자르 캠프에서 생활하고 있는 로힝야 난민 여성 아이샤(Ayesha)와 아시아(Asia)도 그런 여성들 중 한 명입니다.

가장으로서, 여성으로서, 난민으로서, 홀로 속앓이 하며 그 어디에도 꺼내지 못했던 로힝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. 아이샤(Ayesha)와 아시아(Asia), 두 엄마들의 인터뷰 내용을 전합니다.

첫 번째 인터뷰. 두 딸의 엄마 아이샤(Ayesha)

아이샤 카툰(Ayesha Katun, 35)

 

Q. 어떻게 남편과 헤어지게 되었나요?

A. 남편과 아들, 두 딸과 저녁식사를 먹던 중 갑자기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. 나가 보니, 모르는 사람들이 마을 집들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죠. 우리는 도망치기 시작했어요. 그 순간 남편이 제 등 뒤에서 총에 맞아 쓰러졌죠. 쓰러진 남편에게 다가가던 아들 역시 총에 맞았어요. 총격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고, 차마 세상을 떠난 남편과 아들을 안아보지도 못한 채 딸들을 껴안고 도망쳐야 했어요. 도망가는 수많은 사람들 무리에서 함께 달렸어요. 그게 우리 가족의 비극의 시작이었죠.

Q. 이전 고향에서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?

A. 고향 미얀마에서 도망쳐온지 약 12개월이 지났어요. 여전히 매일 밤 미얀마에서 행복했던 생활이 꿈에 나오죠.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어요. 가족들에게 다정했고, 가사일도 잘 도와주었죠. 때로는 낭만적이어서 해바라기 꽃도 선물해줬죠. 여전히 꽃이나 노란색 물건들을 보면 그가 떠올라요. 물론 캠프에는 오직 진흙과 먼지만 있죠. 미얀마의 집에는 강낭콩, 옥수수를 재배했던 정원이 있었어요. 또 4개의 침실과 전기, 주방, 선풍기가 딸린 집도 있었죠. 세상을 떠난 20살 아들 역시, 이틀 뒤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어요. 하지만 남편과 아들에게 발사된 총소리와 함께, 그 모든 일상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어요.

부르카를 머리에 두르고 물을 길러 오는 아이샤(Ayesha)

 

Q. 요즘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가요?

A. 여성으로서, 난민캠프에서 한 가족의 가장이 된다는 건 쉽지 않아요. 저의 어려움보다 딸들을 떠올렸을 때 미안함이 크죠. 매일같이 장작과 물을 구해 와야 하는데, 집 안의 부르카는 단 하나 뿐이어서 제가 외출을 할 경우 딸들은 숙소 앞 화장실마저도 갈 수 없어요. 그마저도 혹시 모르는 납치 걱정에 맘이 편하지 않죠. 아빠나 오빠가 있었다면 더 든든했을텐데…

Q.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가요?

A. 딸들은 분홍색을 좋아하고,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요. 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, 그 어느 것도 감당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. 막내 딸은 옷이라곤 낡은 원피스 하나 뿐입니다. 캠프 내 어린이 학교에 갈 때도, 밤새 그 원피스를 빨아 입혀야 하죠. 저의 문화권에서 남편없이 여성이 진취적으로 일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. 지금은 돈이 없지만, 훗날 딸들이 결혼할 때 필요한 지참금은(*문화권에 따라 신부 측에서 신랑 가족에 내는 결혼비용) 꼭 모아서 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. 딸들이 저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.

아이샤(35)와 그녀의 두 딸(18,10)

 

두 번째 인터뷰. 두 아이의 엄마 아시아(Asia)

아시아와 그녀의 아이들, 그리고 옥스팜 활동가 이파트(Iffat)

 

Q.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뒤 적응이 어렵지 않았나요?

A. 처음 방글라데시에 도착했을 때, 음식도 돈도 아무것도 없었어요. 다른 난민들에게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구걸해야 했죠.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헛구역질과 두통이 심해져요. 그 정도로 저와 아이들에겐 고통스런 시간이었어요.

Q. 어떻게 캠프 생활이 더 나아질 수 있었나요?

A. 캠프에 도착해서 만난 옥스팜 직원들이 임시 숙소(텐트)를 제공해주었어요. 또 태양열 램프를 제공받아 숙소 내의 전기를 대체할 수 있었죠. 굶어가던 우리에게 식량 바우처와 비누, 여성 용품, 물통, 치약 등의 옥스팜 위생 키트도 제공해 주었어요. 제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대가없는 사랑과 관심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옥스팜 활동가들을 만났죠. 이웃처럼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저와 아이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해주고 있어요.

옥스팜에서 제공받은 태양열 패널, 비누, 옷을 만들 천을 보여주는 아시아(Asia)

 

Q. 홀로 낯선 곳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게 어렵진 않나요?

A. 제 남편은 둘째 딸이 40일이 되던 날 우리 가족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떠났어요. 매일 밤 울었죠.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홀로 해내야 하니까요. 그래도 아이들이 꺄르르 웃는 소리 한 번이면 모든 고통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죠.

이 곳 캠프에서도 마찬가지에요. 고향도 아닌 낯선 곳에서, 제 아이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점은 늘 긴장되죠. 특히, 낯선 남자들 사이에서 요리에 필요한 장작과 쌀, 식량 등을 구해와야 할 때 가장 무섭고 두려워요. 특히 우기가 다가오면서 인신매매, 성폭력, 납치 등의 소식을 듣게 되는 날엔 두려움이 더 커지죠.

Q. 향후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?

A.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지금 제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. 지금 캠프에 닥친 우기를 대비해 식량을 챙겨두고, 텐트를 더 튼튼히 고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예요. 또 얼마 전 옥스팜에서 설치해 준 저희 구역의 깨끗한 식수펌프와 화장실도 오랫동안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어요. 특히 옥스팜 태양광 가로등이 생기면서 밤에도 여자 혼자 화장실을 갈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요. 지금처럼 아이들이 매일 학교에 가고, 굶주리지 않고, 편안히 잠이 드는 나날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.

옥스팜은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 내 가장 취약한 여성과 아동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도 현장에서 인도주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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